1. 아일랜드에 대한 켄 로치의 접근
아일랜드는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나라이다. 신비로운 아이리쉬 음악, 테러조직 IRA,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락밴드 U2 등을 통해서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존재감을 인식할 정도로 우리는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로 아일랜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보다 영국 역사에 비추어진 아일랜드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슬픈 피지배 역사에 대해 가늠할 뿐이다. 켄 로치(Kenneth Loach) 감독은 본 영화를 통해 아일랜드의 슬픔과 그 속에서 빚어지는 슬픔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1-1. 이 영화가 2006년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이자 깐느의 선택을 받은 명작답게 영화는 잘생긴 외동아들을 보듯이 준수하게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상업영화들이 과장된 영상, 기복있는 연기 및 흥행을 위한 제반 사항을 무시할 수 없는 것에 비해 본 영화는 작품 내부적으로도 굉장히 우수한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정한 힘은 바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서 비롯된다. 켄 로치 감독은 상술한 상업영화의 공식을 비웃듯이 전형성을 탈피한 묘사를 시도한다. 보통 민족의 독립, 이념의 대결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에는 넓은 배경에 기반하여 거대담론을 제시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켄 로치 감독은 배경은 끝까지 아일랜드의 어느 한 소도시에 한정하는 미시적인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영화에 담긴 철학과 감동의 크기에 있어서는 비슷한 시대적 테마에 접근하는 ‘마이클 콜린스’와 같은 영화에 비해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 좋은 감독, 좋은 연기자가 합심하여 이루어낸 양질의 결과라 칭찬할 수 있을 것이다.
2. 아일랜드 투쟁사에 대한 감상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이 절정에 달한 1920년대 즈음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의 일반적인 역사 교육을 받고서는 아일랜드의 역사에 대해 이해도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지배-피지배 관계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놀랄 정도로 쉽게 그리고 절실하게 공감할 수가 있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으로 학습된 경험에 의해 타민족의 지배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쉽게 영화 속 아일랜드 독립군과 동화되고 영국군을 침략의 온상으로 어려움없이 타자화시킬 수 있다. 영국인 감독인 켄 로치가 영화를 보는 주된 대상을 지배의 역사적 경험을 가진 강대국의 후예로 잠정적으로 예상하고 영화를 풀어나가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본의아니게 주제에 더욱 용이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점이 주어진 셈이다.
이러한 공감대는 영화 초장부터 우리에게 적용된다. 영국군에 의해 트집이 잡혀 살해당하는 미하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학습된 일제시대의 잔악한 양상을 떠올리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한 분노를 뿜어낼 수 있다. 기껏해야 대등한 입장에서 독일과 전쟁을 치루어 봤을 뿐인 제국의 후예 현대 영국인들이 피지배국민의 감수성을 이해하기란 여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일랜드의 지식인 계층인 주인공 데미안은 의사라는 신분을 통해 지배국의 사회에 쉽게 편입될 수 있는 지위에 있다. 그러나 그는 미하일의 죽음 및 기차역 소동과 같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에 대한 민족의 요구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지식인의 각성은 우리나라의 윤치호와 같은 식민사회의 지식인들이 변절해간 과거와 비교를 통해 더욱 호의적인 시선을 이끌어 낸다.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의 체결 이후 조약의 비준과 관련한 다툼 또한 우리에게 과거 비슷한 상처를 상기시킨다. 조약 체결 후 드 발레라로 대표되는 완전 자주 독립파와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자치파의 대결은 그 대립 양상을 보건대 1948년 남북한의 총선거를 통한 완전한 통일 한국의 성립 대 남한만의 제한적 선거를 통해서라도 국가의 성립을 주장한 세력간의 대립과 비슷하다(‘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와 같이 자주 독립파가 사회주의의 이념적 지원사격을 받는 상황이라면 더욱 우리의 역사와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은 이러한 투쟁이 모두 아일랜드 민족의 본래의 업보가 아니라 지배자 영국이 남겨놓은 불필요한 유산에 불과한 것이기에 조약을 둘러싼 대립이 내전으로 비화되는 모습은 우리 한국전쟁의 우울한 역사를 답습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이때 잉태된 아일랜드의 역사적 비극은 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배경을 떠나서 후대에까지 나타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1972년 1월 31일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피의 일요일’사건을 들 수가 있다. 영화 ‘Bloody Sunday’1)에서 잘 보여주듯이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지를 무장한 군인들이 짓밟는다는 점에서 이는 우리 역사의 광주민주화운동과 굉장한 유사성을 지닌다. 이렇게 아일랜드 역사에 기반한 영화들은 억압과 피지배의 정서를 풀어내는 것을 주제로 즐겨 삼기에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을 가지게 된다. 그나마 현재 아일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국가적, 민족적 갈등이 어느정도 형해화된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역사적 투쟁과 갈등이 결코 헛된 것만이 아니었노라 되뇌일 수 있을 것이다.
3. 소박한 이들의 이념적 갈등
영국-아일랜드 조약 이후 아일랜드는 외적으로는 더블린 궁을 회복하였지만 내적으로는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영화는 이 대립을 테디로 대표되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현실주의 노선과 댄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데미안으로 대표되는 조약반대파의 사회주의적 노선으로 이원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영화 ‘마이클 콜린스’에서 이념적 대립의 코드가 부존재했던 것에 비하면 재미있는 설정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안에서 나름 자본주의 문화를 꽃피웠을 더블린이 배경이 될뿐더러 저항 세력의 핵심인 IRA, 신페인당 등이 모두 부르주아적인 냄새를 감추지 않는다. 허나 본 영화의 배경은 농업이 주된 산업을 이루는 지방의 소도시를 벗어나지 않기에 결핍의 코드와 친할뿐더러 사회주의 이념이 침투하기에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다.
영화 초반에 저항세력의 결사가 조직되면서 그 주된 구성원을 마을 농민으로 이룬 점 및 그 저항군이 영국군을 기습할 때 승리를 거두고도 무거운 표정을 떨구어내지 못한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테디의 저항군이 콜린스가 이끄는 IRA와 같이 전사들의 집단이 아닌 그저 거대 담론에 휩쓸려 무기를 들게 된 순박한 농민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려한 장치라 해석될 수 있다. 저항군의 지도부는 일장 훈시를 통해 그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더 나아가 이념적 탈선을 방지하려고 한다. 독립을 위한 투쟁을 갈망하는 전사의 일대기였던 ‘마이클 콜린스’와 비교하여 이 소도시 주민들의 봉기는 소박하고 우둔해보이지만 그만큼 처절하다. 이 소박하지만 솔직한 저항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음을 감독 스스로도 고백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자신들의 은신처를 불태우는 영국군을 분통을 터뜨리며 숨어서 바라보는 장면은 이 소도시의 저항운동 자체의 소박한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해석된다.
데미안이 아이를 진료하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영양실조 진단을 내리는 모습 또한 이념적 대립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라 볼 수 있다. 독립 아일랜드의 미래를 열어갈 어린이가 영양실조에 걸린 모습을 통해 감독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무거운 담론을 떠나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적 이념의 온당함을 설파하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아일랜드의 완전한 자주독립도 물론 중요하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행복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조약 체결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이 군복을 맞춰 입고 도시를 지배하는 자유국군과 그 수장 테디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투쟁의 결과물이 그저 지배자가 영국군에서 자유국군으로 바뀌는 것에 불과해서는 안된다고 감독을 역설하는 것이다.
4. 형제의 비극과 아일랜드의 아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특히 주인공 데미안과 그 형인 테디 오도노반의 이념적 대립을 통해 그 비극성을 절실하게 묘사하려 한다. 이때 데미안과 테디가 친형제이면서 함께 투쟁을 한 동지이고 더욱이 크리스 라일리에 대해서 마음의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끝내 이들은 형제의 이름으로써 이념 대립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다. 혈연관계에 놓인 이들이 이념적 대립의 광풍에 휘말려 서로의 목을 겨누는 상황은 이미 낯선 소재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초대형 흥행작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감동에 어느정도 학습된 바가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감독이 비극성을 고조시키기 위해 설정한 몇가지 장치들이 눈에 띈다.
먼저 크리스 라일리의 죽음은 테디와 데미안 모두에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독립과 투쟁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 갈등의 수레바퀴에 치어 사망한 크리스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소재이다.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치와 신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크리스는 바로 앞 문단에서 서술한 소박한 농민 저항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저 교회 옆에 묻어달라는 구두 유언을 통해 감독은 크리스의 순박함을 재확인한다. 사형 집행 바로 전날 이러한 크리스를 자신이 죽였다고 눈을 부릅뜨는 데미안의 모습은 소중한 사람을 자신이 직접 죽였을 정도로 선택한 신념과 그 반하는 이념에 대해 타협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데미안의 고백은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그것을 딛고 나아갈 정도로 자신의 신념이 굳건함을 증명한 것이다.
또다른 비극성 고조의 증폭장치는 사형 집행 전날 데미안과 테디가 독대하는 장소가 과거 저항군 시절 반란군으로 수감되었던 바로 그 감옥이라는 것이다. 한때 같은 목적을 위해 서로를 마음에 품고 신뢰하였지만 이제는 바로 과거의 그 장소에서 서로의 입장을 증오하고 다른 목적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가슴이 쓰려옴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형제 사이의 우애, 신의와 같은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에 살고 있기에 더욱 가슴아프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둘러싼 내전은 저항에 지친 아일랜드인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강요하였을 것이다. 이들 형제의 아픔은 비단 이들만의 것이 아니라 전 아일랜드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 하여 영국인 감독 켄 로치가 미안함을 가지고 공을 들여 묘사한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5. 마치며
19세기의 아일랜드 역사가 리키(William E. Lecky)는 “인류 역사상 이처럼 고난을 겪은 민족은 없었다”고 아일랜드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아일랜드는 정복되고 멸시 받은 민족이었으며, 그런 짓을 한 타자는 바로 잉글랜드였다.3)아일랜드의 비극은 오랜 저항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고 승리 바로 직후 이어진 내전, 완전한 독립을 얻지 못한 업보로 1972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등 지긋지긋하게 아일랜드 민족을 괴롭혀왔다. 현대에 들어서 아일랜드가 무섭게 유럽 내 선진국으로 번영을 누리는 것은 이러한 조상들의 희생과 저항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일랜드에 슬픈 의미의 보리밭은 피지 않겠지만 깐느영화제 시상식장에서 켄 로치 감독이 경고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세계 다른 곳에서 보리밭이 피어선 아니될 것이라 생각한다.